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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허가 지키는 것은 직업이 아니라 서명이다

글 YOU’RE NEXT 편집부 · 작성일

“그래도 면허가 있으니까.” AI 이야기가 나오면 의사, 약사, 세무사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자주 듣는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한국 752개 직업을 판정하며 쌓은 기록을 다시 읽어 보니, 면허가 지켜 주는 범위는 생각보다 좁았다. 면허는 직업 전체가 아니라 마지막 서명과 책임을 지킨다. 그리고 그보다 더 단단한 방패는 따로 있었다.

장벽 점수가 높으면 늦다, 대체로는

우리는 직업마다 면허, 서명 책임, 규제, 공무원 신분, 단체협약처럼 대체를 늦추는 장치를 0점에서 3점까지 매긴다. 이 장치가 실제로 몇 년을 늦추는지까지 따진 점수다. 752개 가운데 절반 가까운 351개가 0점이고, 3점은 78개뿐이다.

점수별로 예상 시점의 중앙값을 놓아 보면 경향은 분명하다.

제도 장벽직업 수예상 시점 중앙값7년 안에 시작
0점3512033년 5월51.9%
1점1892032년 10월51.3%
2점1342035년 11월20.1%
3점782043년 1월1.3%

3점 직업 78개 가운데 7년 안으로 나온 것은 구조기술사 하나다. 여기까지만 보면 “역시 면허”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표를 다시 보면 이상한 대목이 있다. 장벽이 하나도 없는 0점 직업의 중앙값이 1점보다 오히려 늦다. 점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0점 쪽에 섞여 있다는 뜻이다.

진짜 방패는 몸이었다

그 무언가는 몸이다. 752개 중 342개는 현장에서 몸을 써야 하는 일로 분류돼 있는데, 이 직업들의 예상 시점 중앙값은 2036년 11월이다. 나머지 410개, 이른바 책상 위의 일은 2032년 10월이다. 4년이 넘게 벌어진다.

0점 직업만 놓고 봐도 그렇다. 책상 위의 일은 2030년 10월, 몸 쓰는 일은 2034년 11월이다. 0점 중앙값이 늦게 나온 것은 0점에 몸 쓰는 직업이 많이 몰려 있어서였다. 면허 하나 없이도 오래 남는 직업이 적지 않다. 배관 세척·하수구 청소 기사와 이삿짐 운반원은 2047년 2월, 반려동물 미용사는 2049년 2월로 나온다. 판정 이유는 셋 다 같은 쪽을 가리킨다. 좁고 매번 다른 현장에서 하는 손일을 로봇이 한 세대 안에 대신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반대편 끝에는 면허도 몸도 필요 없는 데이터 입력원과 번역가가 있다. 둘 다 이미 시작됐다고 봤다.

두 요인이 겹치는 곳에서는 결과가 극단적이다. 몸을 쓰면서 장벽도 3점인 직업 14개는 하나도 빠짐없이 위험도 ‘낮음’이 나왔다. 소방관, 응급구조사, 치과의사가 여기에 있다.

법이 붙잡고 있는 것

의료와 돌봄 쪽에서 면허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면 ‘서명을 지킨다’는 말의 뜻이 선명해진다. 의료법은 의료인이 아니면 의료행위를 할 수 없게 하고, 직접 진찰한 의사가 아니면 진단서를 내줄 수 없게 한다. 약사법은 약사와 한약사가 아니면 의약품을 조제할 수 없게 한다. 노인복지법 시행규칙은 노인요양시설에 입소자 2.1명당 요양보호사 1명을 두도록 한다. AI가 판독 초안을 쓰고 기록을 정리해도, 그 결과를 확인하고 책임지는 사람은 법이 정해 둔 셈이다.

그래서 우리 판정은 의사를 2038년 12월, 간호사를 2045년 1월, 요양보호사를 2052년 3월로 본다. 의사보다 간호사와 요양보호사가 더 늦다는 점을 눈여겨볼 만하다. 면허의 무게보다 침상 곁에서 몸으로 하는 일이 더 오래 버틴다는 판단이 그대로 드러난 순서다.

면허가 있어도 이른 직업들

반대 사례가 더 많은 것을 알려 준다. 장벽이 2점 이상인 212개 직업 가운데 12개는 5년 안에 시작된다고 봤다. 세무사, 법무사, 관세사가 2030년 10월이고 손해사정사가 2031년 4월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일의 대부분이 서류와 신고라는 데 있다. 정해진 양식을 채우고 규정에 맞는지 확인하는 일은 AI가 빨리 가져간다. 자격이 끝까지 지키는 것은 서명과 책임이라는 좁은 영역이다.

그렇다고 이 직업들이 사라진다고 본 것은 아니다. 12개 중 10개는 직업 자체가 없어지는 ‘대체’가 아니라, 같은 일을 더 적은 사람이 하게 되는 ‘축소’로 판정했다. 면허를 가진 사람은 남고, 그 아래에서 서류를 만들던 보조 인력과 신입 자리가 먼저 줄어드는 구조다. 약사도 비슷하게 읽힌다. 장벽은 2점이지만 예상 시점은 2033년 5월이다. 약국을 연 약사보다 고용된 근무약사와 제약회사의 허가·학술 업무가 먼저 영향을 받는다고 봤다.

“면허가 있으니까”를 고쳐 묻기

이 기록을 다 읽고 나면 질문을 바꾸고 싶어진다. 면허가 있느냐가 아니라, 면허가 내 하루의 어느 부분을 지키느냐를 물어야 한다. 서명 한 줄을 위해 하루 여덟 시간 서류를 만든다면, 서명은 남아도 여덟 시간은 남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매번 다른 현장에서 손과 몸으로 하는 일이라면, 면허가 없어도 생각보다 오래 버틸 수 있다.

우리 판정이 틀릴 수도 있다. 로봇의 가격이 예상보다 빨리 떨어지면 몸 쓰는 일의 시계도 앞당겨질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기록이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다. AI 앞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자격증 그 자체가 아니라, 대신 서명해 줄 수 없는 책임과 대신 움직여 줄 수 없는 몸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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